80년대 반도체 시장 주름 잡던 일본... 몰락한 이유
미국의 대일본 통상압박...'플라자 합의'로 일본 기업의 반도체 가격경쟁력 급격히 악화
일본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의 등장
라피더스, 훗카이도 치토세시에 신공장 기공식... 미국 IBM이 적극 지원

80년대를 주름 잡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몰락한 이유는 무엇이며 일본은 재도약 할 수 있을까.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 산업은 1980~90년대에 일본의 주축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반도체 기술과 제조 업무에서 선두 주자로 인정받았으며, 엔화의 강세로 인해 수출도 호조였다. 일본 기업들은 메모리 칩, 반도체 제조 장비, 그래픽 카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적 우위를 유지했다.

미국 인텔 등과 비교해 수율(웨이퍼 한 장에서 뽑아내는 칩 비율)도 높을 뿐 아니라 무려 10%나 저렴한 가격에 납품이 가능했다. 여기에 당시 저평가돼 있던 일본 환율도 유리한 수출환경 조성에 힘을 보탰다. 이렇게 일본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초중반 세계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나갔다.

일본경제산업성(2021.3.24) '제1회 반도체·디지털 산업 전략 검토 회의' 갈무리

1990년 전후, NEC나 도시바, 히타치 제작소, 후지쯔, 마쓰시타 등의 6개의 일본 기업이 매출의 세계 랭킹으로 상위를 석권하고 있었다. 반도체 시장 조사 업체인 IC인사이츠에 따르면 1990년 당시 일본 6개의 기업이 D램 시장의 80%를 차지했고, 톱 10 기업 중 미국 기업은 인텔과 TI, 모토로라 등 3개 기업뿐이었다.

1980년대 이전까지 미국 기업이 장악했던 반도체 시장은 어느새 일본 기업들이 잠식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 시작된 레이건 정부는 당시 전 세계 반도체 매출 톱 10 기업 중 6개가 일본 기업이라는 데 크게 위기감을 느꼈다. 레이건 정부는 일본 반도체 기업의 덤핑이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압박했고, 미국 언론은 일본 반도체 기업의 저가 공세를 '제2의 진주만 공습'으로 비유하며 미국 정부의 공격에 힘을 실어줬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도 일본 반도체 산업의 강세가 꺾이지 않자 미국 반도체 산업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그러면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통상압박을 하기에 이르렀다. 1985년 6월 14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의 무역대표부(USTR) 청원으로 반도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시장 진입 장벽, 외국산 반도체 차별,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원, 정부 주도의 반도체 투자 및 생산설비 확대 등이 요지였다. 이로부터 정확히 열흘 뒤 다시 미국 마이크론이 일본 반도체 기업 7곳을 덤핑혐의로 USTR에 제소했다. 이어 9월까지 인텔, AMD, 내셔널세미컨덕터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일본 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덤핑 관련 제소가 이어졌다.

미국의 대일본 통상압박의 정점은 상무부가 찍었다. 기업들의 제소 없이도 상무부 직권으로 특정국 수출품의 덤핑 여부 등을 조사하고 이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역 제재수단으로써 그 타깃이 일본이 된 것이다. 레이건 정부는 또한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1985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과 함께 서방 5개국 재무장관(G5) 회의를 열고, 일본 엔화와 서독 마르크화의 고평가와 미 달러 저평가가 이뤄지도록 환율조작을 압박했다. 이것이 바로 '플라자 합의'이다. 미국의 힘에 의해 이뤄진 이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 기업의 반도체 가격경쟁력이 급격히 악화됐다.

여기에 더해 제1차 미일 반도체협정(1986년 9월~1991년 7월)에 이어 제2차 반도체 협정은 1991년에 성립하였고, 5년 후인 1996년 2월에 재검토하여 협상이 이루어졌다. 일본 측에서는 국내외 반도체 셰어가 목표의 20%를 넘고 있는 것, 덤핑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미국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게다가 향후 미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포함한 '세계 반도체 회의(WSC)'의 설립의 제안했다. 미국 측은 협정이 없어짐으로 인한 외국 반도체 점유율 저하, 덤핑 재발을 우려하고, 정부 관여를 지속할 것과 미일 2개국간의 반도체 회의를 주장하며, 서로의 주장이 엇갈린 채로 같은 해 7월 밴쿠버에서의 최종 협상에 임하게 되었다. 그동안 회원들간의 강한 협상 결과 마침내 10년간 이어진 미일 반도체 협정은 종결하게 되었고 일본 반도체는 이후 내리막 길을 걷게 된다.

또한 일본 측이 주장한 다극화를 포함한 WSC로 업계 간에서 덤핑 방지의 틀을 정해서 가맹 메이커의 참가를 요구하는 것도 합의되어, 유럽, 한국을 회원으로 추가해 1987년에 제1회 WSC 회의가 개최되었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향후 2030년에는 거의 세계점유율이 0%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는 내부적으로 우려석인 목소리가 나올 만큼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1997년 인텔은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의 자리를 되찾았고, 그 이후 현재까지 왕좌를 지키고 있다. 당시 인텔의 뒤를 이어 모토로라, TI 등 미국 기업들이 상위권에 올랐고, 삼성전자도 그 이후에 반도체 매출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 반도체 메이커별 매출 랭킹 톱 10 /EETimes Japan 갈무리

2021년 '전 세계 반도체 매출 톱 10 기업'에서 일본 기업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에서 이름을 바꾼 키옥시아가 12위 정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일본 기업들의 자리에는 인텔을 비롯해 마이크론, 퀄컴, 브로드컴, 엔비디아, TI, AMD 등 7개 미국 기업이 앉았다.

일본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의 등장

현재의 일본 반도체 시장은 몇 가지 변화를 겪었다. 일본은 기술 혁신에서 한 발 물러나고 한국, 중국 및 대만과 같은 경쟁 상대가 떠오르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일본 기업은 노후화된 생산 시설과 투자 부족으로 인해 경쟁에서 밀렸으며, 일본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정책과 투자를 추진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Rapidus(라피더스)'라는 회사를 새롭게 신설하게 되었다.

지난 9월 1일 라피더스 신공장 홋카이도에서 열린 '​​​첨단 반도체 국산화' 신공장 기공식 /NHK 갈무리

Rapidus(라피더스) : 소니, 도요타 자동차, 덴소, 키옥시아, NTT, NEC, 소프트뱅크, 미쓰비시 UFJ 은행 등 일본 국내 대기업 8개 사가 출자해 반도체 전문가 집단이 설립한 반도체 회사. 일본 정부도 700억 엔의 개발비를 내고 있다.

지난 9월 NHK에 따르면 첨단 반도체의 국내 생산화를 목표로 하는 라피더스는 홋카이도 치토세시에 건설하는 신공장의 기공식을 실시하고 4년 후의 양산화를 향해 본격적인 시작을 했다고 전했다.

치토세시 시도 3노선과 조정 연못 신설,라피더스 공장 신축 /홋카이도 건설신문사 Kensin 갈무리

신공장의 건설 예정지는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의 바로 동부에 있는 '치토세 비비 월드'의 일부이다. 현시점에서는 도쿄돔 약 14개분에 해당하는 약 65 헥타르의 부지를 확보하고 있다. 부지 내에 공장과 연구 시설을 건설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신치토세 공항에 인접해 있고 도마코마이시의 항구에도 30분 이내의 입지가 아주 좋은 편이다. 또 향후 증축이 된 경우 주변의 토지를 약 35 헥타르 취득이 가능해 최종 부지 면적은 100헥타르를 상정하고 있으며, 일본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 공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신공장에서는 2025년에 프로토타입 라인을 만들고, 2027년경의 양산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도 지금까지 3300억 엔의 지원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IBM은 일본의 반도체 제조 스타트업인 라피더스를 지원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한국과 대만 이외의 새로운 파운드리 공장을 두고 싶어 하는 미국과 반도체를 어떻게든 다시 살려보려고 하는 일본이 손을 잡은 것이다.

일본 IBM의 모리모토 노리시계 최고기술책임자는 지난 3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2㎚(1㎚=10억 분의 1m) 기술과 관련해 라피더스 프로젝트에 보다 집중해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있고, 심지어 다른 연구에 쓸 수 있는 자원까지 희생하고 있다"라며, "라피더스가 성공하길 원하고 그것이 글로벌 칩의 안정적 공급에 기여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도 일본이 반도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러 번 부활의 시도를 한 바 있다. 2000년대 초의 아 스프라(ASPLA), 2010년 엘피다(Elpida)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여전히 라피더스라는 새로운 정부투자 회사를 설립했다. 히가시 테츠로 라피더스 회장은 작년에 3 나노미터 수준에서 양산을 시작한 삼성과 TSMC에 비해 “약 20년 정도 뒤처져 있다”라고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라피더스는 2030년대 초까지 2 나노미터 반도체를 양산하겠다는 계획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라피더스는 삼성이나 TSMC도 못한 일을 해 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라피더스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으로 보인다. 아직 기술도, 생산공장도 없는 라피더스지만 벨기에 제휴회사인 IMEC 도움으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두 대를 확보했다. EUV 노광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하는 최첨단 반도체 제작의 필수 장비다. 1년 생산량이 50대 안팎에 불과해 삼성전자와 TSMC가 먼저 손에 넣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던 바로 그것이다.

블룸버그는 "일본이 이러한 지원 정책이 전 세계에서 진행되는 반도체산업 육성 방안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수준이라 볼 수 있다"라며 미국과 중국, 유럽을 뛰어넘는다고 전했다.

라피더스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아주 멀고 험난한 길로 보인다. 라피더스가 추구하는 최첨단 2 나노미터 반도체는 상당한 재정적 투자와 수많은 복잡한 공정을 수반한다. 이 프로젝트에는 엄청난 규모의 엔지니어팀이 필요한데, 현재 라피더스는 TSMC와 같은 최상위권 기업에 비해 인재 인프라도 빈약한 실정이다. 홋카이도의 관련학과의 인원을 늘리는 수준으로는 현재 상황으로는 대응하기 힘들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라피더스는 계속 꿋꿋하게 나아가고 있다. 라피더스가 성공한다고 가정하면 반도체 소재와 장비 분야에서부터 최첨단 반도체까지 반도체 밸류 체인이 완성된다. 미중 경쟁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라피더스가 최첨단 2 나노 반도체 양산에 성공한다면 반도체 시장뿐만 아니라 지방 균형발전이라는 두 가지를 손에 쥐에 된다. 만약 실패할 경우에는 일본의 반도체 부흥 전략은 다시 한번 과거의 실패한 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포인트경제 도쿄 특파원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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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경제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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