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경보 발령한 영국에서 '로제 와인' 판매 급증
와인 산지인 보르도·리오하 부근 산불, 가뭄 등으로 포도 생산 악영향
폭염은 포도나무의 생육 지연... 와인의 지역적 특성·개성 무너뜨려
산불로 발생한 연기도 와인 맛에 영향

유래를 찾기 힘든 폭염이 전 세계를 덮치고 있는 가운데 적색경보를 최초로 발령한 영국에서는 '로제 와인(Rosé Wine)'의 판매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영국 최대 와인 소매업체 마제스틱 와인(Majestic Wine)은 영국에서 적색경보 전후로 로제 와인의 판매가 전주에 비해 49%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수치에는 로제 와인이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보다 17만2000병이 더 많이 팔렸다는 사실과 12초마다 한 병씩 팔렸다는 추세가 포함되어 있다.

다양한 로제 와인 / 사진 = townandcountrymag.com
다양한 로제 와인 / 사진=town&country 갈무리

로제 와인은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의 성질을 일정 부분씩 가지고 있으며 어느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장점이 있다. 은은한 오렌지색부터 핑크, 진홍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매력적인 색을 띠며 기본적으로 차갑게 마시는 와인이기 때문에 폭염 속에서 판매량이 급증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폭염으로 인한 로제 와인의 매출 증가는 흥미로운 현상이지만 문제는 폭염이 전반적인 와인 생산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남서부 란디다스(Landiras) 인근 산불 / 사진 = 지롱드 지역 소방대, 블룸버그 갈무리
프랑스 남서부 란디다스(Landiras) 인근 산불 / 사진 = 지롱드 지역 소방대, 블룸버그 갈무리

최근 폭염으로 인한 잇따른 산불 발생이 대표적인 예다. 프랑스 와인 산지로 유명한 보르도가 속한 지롱드에서 발생한 산불은 2만 헥타르(200㎢)에 달하는 숲을 태웠으며 3만 7000여 명을 대피시켰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인 리오하 인근의 예르가 산(Mount Yerga)에서도 산불이 발생해서 소방관들이 출동하기도 했다.

최장 650km에 달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포 강(Po River)은 폭염이 동반한 최악의 가뭄으로 상당수의 지류가 말라붙었는데, 이곳은 와인 생산을 위한 포도를 비롯해서 이탈리아 주요 농업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곳이다.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는 유럽의 3대 와인 수출 국가로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와인시장 전체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폭염이 포도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나무가 한창 자라는 시기에는 어느 정도 수분 혹은 열 스트레스가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수분과 영양분을 찾아 포도 뿌리가 땅속 깊이 내려 결과적으로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밀도 높은 열매를 맺어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염 수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비티스 비니훼라에 대한 고온의 영향. 세미용 포도나무 성능 및 베리 숙성 / 출처 = 프런티어스(Frontiers)
비티스 비니훼라에 대한 고온의 영향. 세미용 포도나무 성능 및 베리 숙성 / 출처 = 프런티어스(Frontiers)

극단적인 폭염은 포도 덩굴을 직접 태우거나 죽일 수 있고 전반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와인 맛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 2000년대 들어서 10년간 폭염이 이어졌던 호주에서 실험한 내용에 따르면, 폭염으로 인해 포도나무(Semillon, 세미용 품종)의 숙성 속도가 감소되어 수확이 지연되고 이로 인해 시들거나 화상을 입는 발생률은 높아진다는 결과를 얻었다. 실험 과정과 결과를 토대로 연구팀은 포도의 품질 역시 현저하게 감소했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와인 맛을 구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하는 떼루아(terroir), 즉 토양의 유형과 기후에 폭염이 가세하면 지역적인 특색과 개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와인 바이블(Wine Bible)〉의 저자이자 와인 전문가인 카렌 맥닐(Karen MacNeil)은 "기후 변화가 와인 양조에 가져오는 가장 큰 도전은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각지의 생산자들이 가져왔던 와인 생산의 방법과 노하우가 모두 떠버릴 수 있다는 경고도 가볍지 않다.

서부 유럽을 강타한 산불 역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포도나무를 직접 태우지 않더라도 연기로 인해 와인 맛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타면서 생성되는 휘발성 페놀 성분은 포도 표피에 축적되는데 오래 노출될 경우 당연히 내부에까지 스며들기도 한다. 이렇게 침투한 페놀이 포도의 당분과 만나 배당체가 되면 와인이 발효되는 과정에서 독특하고 도드라지는 풍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와인의 본질적인 맛과 향을 훼손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가 쉽게 즐기는 와인은 보통 오크통 숙성과 병입 과정을 거쳐 빠르면 수확 후 1~2년 뒤에 마시게 된다. 2022년 빈티지 와인이 과연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우려와 함께 기다려 본다.

포인트경제 송영권 기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포인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