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아닌 ‘유전체 메모리’ 시대 오나
외부 전기장이 없이도 스스로 분극을 가지는 재료, 바륨지르코늄 산화물(BaZrO₃) 단결정
티탄산바륨과 전혀 다른 대칭성을 가지는 새로운 강유전체

반도체가 아닌 유전체 메모리 시대가 올까. 국내 물리학자들이 세계 최초로 유전율 이용 정보저장 기술을 개발해 화제다. 텅 빈 공간인 0차원 공허와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제어해 유전율을 다중 상태로 바꾼 독특한 아이디어로 주목받고 있다. 

산소 빈자리로 만들어진 0차원 공허 주변의 크리스탈(결정) 구조 변형.(Vo로 표시된 부분은 원래 산소 원자가 위치했던 공간이다. 바륨지르코늄 산화물 웨이퍼 위에서 성장한 티탄산바륨은 사방에서 균일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산소 원자가 빠진 빈자리가 생긴다. 이런 0차원 공허 때문에 분자 사이는 기존보다 멀어지며, 다른 원자들과 상호작용한다. 이런 상호작용은 물질의 유전율을 바꾸고, 상호작용에 따라 다양한 상태를 만들 수 있다. 다양한 상태를 조합하면 다진법 메모리 소자를 구현할 수 있다. 숫자 0과 1을 조합해서 정보를 저장하는 이진법 메모리처럼 A, B, C 등의 상태를 조합해 정보를 저장하는 것.) /연구 이미지=UNIST 제공

19일 울산과학기술원(UNIST) 물리학과 오윤석 교수팀과 울산대학교 물리학과 김태헌 교수 연구팀이 함께 이러한 상호작용이 물질의 유전율 크기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응집물질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2대 저널 ‘어드밴스드 머티리얼스(Advanced Materials)’에 논문명 'Reversibly controlled ternary polar states and ferroelectric bias promoted by boosting square-tensile-strain'으로 9월 7일자 공개됐다.

'Reversibly Controlled Ternary Polar States and Ferroelectric Bias Promoted by Boosting Square-Tensile-Strain(사각-인장-변형률을 높여 가역적으로 제어되는 삼원 극성 상태 및 강유전성 바이어스)' /미국 학술출판사 Wiley 갈무리

일정한 성질을 가진 물질을 이르는 말인 '반도체'와 '유전체'.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 정도 물질인 반도체(半導體, semiconductor)는 가해진 전압이나 열과 빛의 파장 등에 의해 전도도 및 저항이 바뀌는 성질을 이용해 디지털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소자로 만들어진다. 흔히 보는 전자장치의 소재나 소자 모두 아우르는 말처럼 사용되는 말이 됐다. 실상 반도체는 전기를 흘렸을 때 달라지는 저항을 이용할 수 잇는 물질인 재료고, 이것으로 만든 소자를 반도체 소자라고 한다.

유전체(誘電體, dielectric material)는 전기장 안에서 극성을 지니게 되는 절연체(부도체)다. 유전체는 전기가 흐르지 않지만, 전압에 대해서는 유전체의 음전하가, 음전압에 대해서는 유전체의 양전하가 늘어서면서 극성을 지닌다. 유전체에 따라 극이 나뉘는 정도가 다르며, 그것을 유전율이라고 한다.

전기장의 영향을 받아 분극이 일어난 정도를 뜻하는 물리량인 '유전율(Permittivity)'은 유전체, 즉 부도체의 전기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특성값이다. 

같은 양의 물질이라도 유전율이 더 높으면 저장된 전하량이 동일할 때 더 많은 전하를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유전률이 높을수록 전기장의 세기가 감소하고, 높은 유전율을 가진 물질을 축전기에 넣는 유전체로 사용하게 되면 전기 용량이 커지게 된다.

유전율을 이용해 메모리 소자를 만들 수 있는데 반도체 소자 대신 ‘유전체 소자’로 메모리 소자를 만들면 반도체가 가진 단점이나 문제도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앞줄 왼쪽 첫 번째가 김태헌 울산대 교수, 두 번째가 오윤석 교수 /연구진 사진=UNIST 제공

반도체 소자보다 유전체 소자가 좋은 점?

유전체 소자는 에너지 효율이 높고, 반도체처럼 열을 발생하지 않는다. 전기를 이용하지 않고 유전율이라는 고유 특성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메모리를 만들 수 있어 '비휘발성'이다. 현재 반도체 소자들은 더 작은 공간에서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도록 집적도를 높이는 게 중요한데 유전체 소자가 개발되고 사용된다면 집적도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윤석 교수는 “유전율은 어떠한 물질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에서도 정의할 수 있는 물리량”이라며 “별빛이 진공에 가까운 우주 공간을 여행해 지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이유도 유전율로 설명된다”고 설명했다.

2018년에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바륨지르코늄 산화물(BaZrO₃) 단결정’ 생성 기술

공동 연구팀은 새로운 강유전체(Ferroelectrics) 박막을 개발해 ‘0차원 공허’를 만들었는데 강유전체는 외부 전기장이 없이도 스스로 분극을 가지는 재료인데, 외부 전기장에 의해 분극 방향이 바뀔 수 있다. 

새로운 강유전체 박막은 오윤석 교수팀에서 개발한 새로운 웨이퍼(Wafer, 어떤 물질의 단결정 기둥을 적당한 두께로 얇게 썬 원판.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 기판은 실리콘 단결정 기둥을 얇게 썬 웨어퍼를 사용) 소재인 ‘바륨지르코늄 산화물(BaZrO₃) 단결정’ 위에 김태헌 교수팀이 ‘티탄산바륨(BaTiO₃)’ 박막을 증착해 만들었다.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바륨지르코늄 산화물 단결정과 그 웨이퍼(상단), 단결정의 단면(하단). 0차원 공허를 형성하고 다중 유전 상태를 구현하는 핵심. /연구 이미지=UNIST 제공

이 박막은 기존 티탄산바륨과 전혀 다른 대칭성을 가지는 새로운 강유전체가 된다고.

바륨지르코늄 산화물의 격자상수(格子常數, lattice constant, 똑같은 형태와 구조의 분자가 모여있는 결정(結晶)안의 원자 간 가로, 세로, 높이와 같은 간격)는 4.189Å으로 기존 웨이퍼들 대비 압도적으로 큰 크기로 압도적으로 큰 격자상수는 티탄산바륨 박막에 ‘0차원 공허’ 즉 텅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0차원 공허와 주변 원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박막 소재의 유전율 크기를 바꾼다는 것이다.

0차원 공허와 원자 간 상호작용으로 구현된 다중 유전 상태. (티탄산바륨에 산소 원자가 빠져 0차원 공허가 된 상태(가운데)와 전기장을 주어서 분극을 유도한 상태(좌우)는 각각 다른 유전율을 보인다. 이런 상태를 조합하면 0과 1을 조합해 정보를 저장하는 반도체 메모리처럼 유전체 메모리를 만들 수 있다.)/연구 이미지=UNIST 제공

이렇게 변하는 유전율을 메모리 정보에 사용하면 저항을 이용하는 반도체 메모리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고 발열이 없는 메모리 소자 구현이 가능하다. 0차원 공허와 주변 원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용하면 1과 0만 쓰는 이진법 메모리보다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 ‘다진법 메모리’ 구현도 가능하며, 0차원 공허 주변에만 형성된 양자 스핀은 양자 정보로도 활용될 수 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 결과를 활용하면 전통적인 반도체 소재와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메모리 소재나 소자 개발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포인트경제 김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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